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나 역시 푸코를 중세오타쿠로서 중세의 참혹함을 드러내는 패션 학자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었다. 그 생각을 고쳐먹은 건 후에 그가 동료들과 감옥의 재소자들을 만나는 작업을 했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였다.
내 또래의 책벌레들처럼 나도 홈즈나 뤼팽을 열독하던 추리소설팬이었다. 치밀한 오타쿠는 아니어서 기억나는 건 별로 없지만, 어쨌든 그 시절 나 역시 범인을 잡는 것보다 범인과 탐정의 두뇌게임, 그리고 범인의 심리를 이해하고 싶은 충동이 있었다. 아주 약간이지만 범죄심리학이나 범죄인의 인권에 대한 자료를 보면서 나중엔 범죄심리학을 연구하리라 마음먹은 적도 있었다.
푸코를 다시 만났을 때,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이었다. 후세의 지인들은 푸코가 각종 컴플렉스와 스타가 되려는 욕구를 주체하지 못하는 패셔너블한 학자였다는 이미지를 상품화하지만 그가 정부 정책을 만들고, 왕보다는 모델이 되고자 하고, 감옥에 갔다는 사실은 근대가 무엇인가를 가지고 몇 가지 목표를 설정하고 있던 나에게 분명 충격이었다.
푸코에 대한 찬양에는 관심없다. 하지만 그가 감옥과 범죄에 주목했다는 것은 그 후로 지금까지 내 머릿속의 거대한 벽과 같이 남았다. 푸코를 넘어서지 않으면 근대의 마지막 장을 넘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근대를 넘어설 수 있을까? 범죄자를 보지 않고 푸코가 만든 벽을 넘을 수 없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보수 우파는 범죄자에게 강력한 제한을 가하는 것으로 스스로 공동체의 질서를 수호한다고 선전한다. 역사적으로 범죄에 대한 다수의 인식은 이와 다르지 않다. 우파로서 이 인식을 사용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시민권의 확장을 주창하는 좌파에게 범죄자는 어떠한가?
난쏘공을 읽은 독자가 '우리 모두는 난쟁이다' 라고 외쳤다면 이는 어떤 함의를 지니는가. 여기서 난쟁이와 우리는 동의어인가? 그렇지 않다. 이 발화에서 난쟁이는 우리 모두가 벗어던져야 할 멍에지 그 자신은 아니다. 이때 그 우리 모두에 포함된 난쟁이는 어떻게 되는가. 그는 존재없는 존재가 된다. 이렇게 위의 발화는 우리 모두를 위해 난쟁이를 희생하고, 난쟁이의 시체 위에 우리 모두가 난쟁이가 아닌 세상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선언한 셈이 된다. 위의 문장에서난쟁이를 범죄자로 치환해 보라. 우리는 범죄를 줄여야 한다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범죄자를 무존재로 만들 수밖에 없다. 이게 좌파의 딜렘마다.
범죄는 사회적 산물이라고 주장하려는 것도, 범죄자나 재소자의 인권을 얘기하려는 의도도 아니다. 이러한 연구는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오히려 피해자의 사정이 범죄자의 사정에 비해 비어있는 영역이 돼버린 까닭에 피해자학이라는 분야가 새로 생겨나는 상황이다.
내가 주목하는 건 범죄자가 사회의 부산물이라면, 이들이 여생을 혹은 죽음을 사회적 희생양이 되지 않게 하는 방법이다. 처벌은 필요하다. 가능하면 강력하게 필요하다는 게 내 입장이다. 하지만 처벌의 지속은 속죄를 요구하는 행위의 영역을 벗어난다.
내 또래의 책벌레들처럼 나도 홈즈나 뤼팽을 열독하던 추리소설팬이었다. 치밀한 오타쿠는 아니어서 기억나는 건 별로 없지만, 어쨌든 그 시절 나 역시 범인을 잡는 것보다 범인과 탐정의 두뇌게임, 그리고 범인의 심리를 이해하고 싶은 충동이 있었다. 아주 약간이지만 범죄심리학이나 범죄인의 인권에 대한 자료를 보면서 나중엔 범죄심리학을 연구하리라 마음먹은 적도 있었다.
푸코를 다시 만났을 때,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이었다. 후세의 지인들은 푸코가 각종 컴플렉스와 스타가 되려는 욕구를 주체하지 못하는 패셔너블한 학자였다는 이미지를 상품화하지만 그가 정부 정책을 만들고, 왕보다는 모델이 되고자 하고, 감옥에 갔다는 사실은 근대가 무엇인가를 가지고 몇 가지 목표를 설정하고 있던 나에게 분명 충격이었다.
푸코에 대한 찬양에는 관심없다. 하지만 그가 감옥과 범죄에 주목했다는 것은 그 후로 지금까지 내 머릿속의 거대한 벽과 같이 남았다. 푸코를 넘어서지 않으면 근대의 마지막 장을 넘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근대를 넘어설 수 있을까? 범죄자를 보지 않고 푸코가 만든 벽을 넘을 수 없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보수 우파는 범죄자에게 강력한 제한을 가하는 것으로 스스로 공동체의 질서를 수호한다고 선전한다. 역사적으로 범죄에 대한 다수의 인식은 이와 다르지 않다. 우파로서 이 인식을 사용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시민권의 확장을 주창하는 좌파에게 범죄자는 어떠한가?
난쏘공을 읽은 독자가 '우리 모두는 난쟁이다' 라고 외쳤다면 이는 어떤 함의를 지니는가. 여기서 난쟁이와 우리는 동의어인가? 그렇지 않다. 이 발화에서 난쟁이는 우리 모두가 벗어던져야 할 멍에지 그 자신은 아니다. 이때 그 우리 모두에 포함된 난쟁이는 어떻게 되는가. 그는 존재없는 존재가 된다. 이렇게 위의 발화는 우리 모두를 위해 난쟁이를 희생하고, 난쟁이의 시체 위에 우리 모두가 난쟁이가 아닌 세상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선언한 셈이 된다. 위의 문장에서난쟁이를 범죄자로 치환해 보라. 우리는 범죄를 줄여야 한다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범죄자를 무존재로 만들 수밖에 없다. 이게 좌파의 딜렘마다.
범죄는 사회적 산물이라고 주장하려는 것도, 범죄자나 재소자의 인권을 얘기하려는 의도도 아니다. 이러한 연구는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오히려 피해자의 사정이 범죄자의 사정에 비해 비어있는 영역이 돼버린 까닭에 피해자학이라는 분야가 새로 생겨나는 상황이다.
내가 주목하는 건 범죄자가 사회의 부산물이라면, 이들이 여생을 혹은 죽음을 사회적 희생양이 되지 않게 하는 방법이다. 처벌은 필요하다. 가능하면 강력하게 필요하다는 게 내 입장이다. 하지만 처벌의 지속은 속죄를 요구하는 행위의 영역을 벗어난다.